루트비히 폰 미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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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하인리히 에들러 폰 미제스(독일어: Ludwig Heinrich Edler von Mises, 1881년 9월 29일~1973년 10월 10일)는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논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이다.
오스트리아 학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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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 9월 29일(1881-09-29)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 |
사망 | 1973년 10월 10일(1973-10-10)(92세) 미국 뉴욕 |
소속 | |
분야 | 경제학, 정치경제학, 과학철학, 인식론, 방법론, 합리주의, 논리, 고전적 자유주의, 우파 자유지상주의 |
모교 | 빈 대학교 |
지도 교수 |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
지도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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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받음 | |
영향줌 | |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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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미제스는 1906년 빈 대학교에서 법학 및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09년에 오스트리아 상업회의소의 경제 자문역이 되었다. 1차 대전에 복무한 후, 빈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고, 1934년에는 제네바의 국제학 대학원의 국제 관계학 교수가 되었다. 1945년 뉴욕 대학교 객원 교수가 되어 1969년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다.
미제스는 194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1]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지상주의 운동은 미제스의 저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미제스의 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미제스를 전후 시대에 고전적 자유주의 부활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보았다.[2]
미제스의 개인 세미나는 경제학자들의 선도적인 그룹이었다.[3] 하이에크과 오스카르 모르겐슈테른을 포함한 많은 졸업생들이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과 영국으로 이주했다. 미제스는 오스트리아에 약 70명의 가까운 학생들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4]
그는 《화폐 및 신용 이론》(1912), 《사회주의》(1922), 《인간행동론》(1949)과 같은 대작 이외에도 《전능한 정부》(1944), 《관료제》(1944), 《이론과 역사》(1957),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1960), 《경제학의 궁극적 기초》(1962)와 같은 수많은 저서를 통하여 다방면에 걸쳐 창의적인 업적을 남겼다. 미제스는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F. A. 하이에크), 두 명의 미국 경제학회 회장(고트프리트 하벌러와 프리츠 매클럽),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많은 경제학자들(오스카 모르겐슈테른, 머리 로스바드, 이스라엘 커즈너 등)을 제자로 배출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학자들이 미제스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부인 마르기트 폰 미제스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함께한 세월》에서 미제스에 대해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