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정치인 (1883-194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이탈리아어: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문화어: 베니또 무쏠리니, 1883년 7월 29일 ~ 1945년 4월 28일)는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정치인이다.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192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였다. 1925년부터 무솔리니는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936년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 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주해 1]였다. 또한 무솔리니는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 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후 도주하여 망명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고 그 수반이 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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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의 제27대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 | |
임기 | 1922년 10월 31일~1943년 7월 25일 |
전임 | 루이지 팍타 |
후임 | 피에트로 바돌리오 |
이탈리아 왕국의 제1대 두체 | |
임기 | 1921년 11월 9일~1943년 7월 25일 |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제1대 두체 | |
임기 | 1943년 9월 23일~1945년 4월 25일 |
이탈리아 왕국의 제50대 외무부 장관 | |
임기 | 1922년 10월 30일~1929년 9월 12일 |
전임 | 카롤로 스칸제르 |
후임 | 디노 그란디 |
이탈리아 왕국의 제52대 외무부 장관 | |
임기 | 1932년 7월 20일~1936년 6월 9일 |
전임 | 디노 그란디 |
후임 | 갈레아초 키아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3년 7월 29일(1883-07-29) |
출생지 | 이탈리아 왕국 프레다피오 |
사망일 | 1945년 4월 28일(1945-04-28)(61세) |
사망지 |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로레토 광장 인근 주유소 |
국적 | 이탈리아 왕국 |
정당 | 이탈리아 사회당(1901–1914) 파시스트 혁명 행동(1914–1921) 국가 파시스트당(1921–1943) 공화 파시스트당(1943–1945) |
배우자 | 라켈레 무솔리니 |
자녀 | 에다 무솔리니 비토리오 무솔리니 브루노 무솔리니 로마노 무솔리니 애나 마리아 무솔리니 |
직업 | 정치인, 여행가, 소설가, 선생 |
묘소 | 이탈리아 프레다피오 산 카시아노 공동묘지 |
서명 | |
군사 경력 | |
복무 | 이탈리아 왕국 육군 |
최종계급 | 이탈리아 제국 원수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제2차 세계대전 |
무솔리니는 국가주의, 협동조합주의, 생디칼리즘, 팽창주의, 사회진화론, 반공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 이념들을 조합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를 막기 위한 검열의 필요성을 선전하였다.[1]
1924년부터 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라 불리던 로마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무솔리니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2]
무솔리니는 1935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이탈리아 조약을 채결하는 등 프랑스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찰외교적 위치를 바꾸어 추축국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3년 연합국에 패배한 뒤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웠으나 1945년 공산주의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