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5세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샤를 5세(Charles V, 1338년 1월 21일 뱅센 - 1380년 9월 16일 샤토 드 보테, 현 노장쉬르마른), 통칭 현명왕(le Sage)는 선량왕 장 2세의 아들로 1364년부터 1380년까지 프랑스의 국왕이었다. 1328년부터 프랑스를 통치한 발루아 왕조 출신으로는 3번째 군주이기도 하다.
샤를 5세 | |
---|---|
프랑스의 군주 | |
재위 | 1364년 4월 8일 ~ 1380년 9월 16일 |
대관식 | 1364년 5월 19일 |
전임 | 장 2세 |
후임 | 샤를 6세 |
이름 | |
별호 | 현명왕(le Sage)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38년 1월 21일(1338-01-21)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뱅센 |
사망일 | 1380년 9월 16일(1380-09-16)(42세)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노장쉬르마른 |
가문 | 발루아 왕가 |
부친 | 장 2세 (프랑스) |
모친 | 본 드 뤽상부르 |
배우자 | 잔 드 부르봉 |
자녀 | 샤를 6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
묘소 | 프랑스 왕국 생드니 생드니 대성당 |
샤를 5세의 치세는 백년전쟁의 제1기가 끝난 것으로 유명하다. 샤를 5세는 아버지 장 2세와 할아버지 필리프 6세가 잃은 영토를 거의 대부분 탈환하고, 왕권을 복구해 나갔으며, 크레시 전투(1346)와 푸아티에 전투(1356)의 패배,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와의 갈등과 유럽의 거의 전 지방을 덮친 1347-1351 흑사병 유행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던 왕국을 구해냈다.
매우 학식있던 샤를 5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전신인 첫 번째 왕립 도서관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49년, 그 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봉토이던 도피네 드 비엔누아를 매입하면서, 샤를 5세는 장자이자 계승자로서 도팽 칭호를 받은 첫번째 왕자가 되었다.
샤를 5세는 1357년 선량왕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의 패배로 영국의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끌려갔을 동안 (3년간), 섭정을 했다. 그러나 완고왕 루이 10세의 손자로서 프랑스의 왕위를 계속 요구하던 나바라 왕과, 왕국에서 삼부회가 지니는 역할을 강화하고자 한 파리 상인대장(prévôt des marchands de Paris) 에티엔 마르셀은 샤를 5세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국가가 내전에 처했으나, 샤를 5세는 왕위가 발루아 가문에서 타 가문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왕위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런던에서 아버지 장 2세가 죽고 나서 1364년 프랑스 국왕으로 대관식을 한 샤를 5세는 법치국가에 입각하여, 아버지의 조언가들이 수립한 안정적인 재정 정책을 이어나가며 왕권을 복구했다. 샤를 5세의 치세는 금세 당시 좋은 정부의 기준이었던 성 루이의 치세와 유사하다고 여겨졌다.
중세 말기의 행정기구 연구가 프랑수아즈 오트랑은 그를 세금의 아버지라 불렀다. 최초로 도팽의 칭호를 가진 왕태자이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건축을 진흥하는 등 프랑스의 번영과 발전에 이바지한 현명한 왕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