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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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라틴어: Ludovicus II Germanicus, 독일어: Ludwig II der Deutsche 802년[1] – 876년 8월 28일)은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셋째 아들이다. 817년부터 바이에른의 왕(재위 817∼840)이었고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부터는 동프랑크의 왕(재위 843∼876)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를 초대 군주로 본다. 별명 "게르마니쿠스"란 "독일왕"으로 번역될 수 있다. 조카 루도비쿠스 2세를 "이탈리아왕", 삼촌 루도비쿠스 2세를 "독일왕"이라고 구분한다.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Ludovicus II Germanic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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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바라크의 독일 황제록의 루도비쿠스 2세. | |
동프랑크인의 왕 | |
재위 | 843년-876년 |
전임 | 로타리우스 1세 |
후임 | 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 (작센 왕)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슈바벤 왕) |
바이에른의 왕 | |
재위 | 817년-843년 |
전임 | (신설) |
후임 | 카를로마누스 |
신상정보 | |
출생일 | 802년 |
사망일 | 876년 |
왕조 | 카롤루스조 |
부친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
모친 | 하스바니아 사람 이르민가르드 |
종교 | 천주교 |
814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고 같은 해 부왕에 의해 바이에른을 상속받기로 결정되었으며, 817년 제국계획령으로 바이에른 왕에 봉해졌으며, 825년에 바이에른 통치권을 위탁받아 이듬해부터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롤루스 칼부스가 태어나면서 상속령이 바뀌자 830년부터 833년 형 피피투스, 로타리우스 등과 함께 아버지 루도비쿠스 피우스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840년 부왕이 죽은 후 맏형이 로타리우스 1세로 즉위하여 왕국 전체를 차지하자 이복동생 카롤루스와 손잡고 로타리우스 1세에 대항하였으며, 841년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리우스를 깨뜨렸다.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에 의해 라인 동쪽의 동프랑크 왕국을 얻었다. 853년 아키텐의 귀족들의 원조 요청으로 아들 루도비쿠스를 보내 아키텐의 피피누스 2세를 석방시켰으며, 858년~859년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 칼부스를 폐위시키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861년부터 그는 영토 분할을 계획했으나, 873년 무렵까지 상속령에 반발을 품은 아들들의 반란에 봉착해야 했다. 870년의 메르센 조약에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칼부스와 로트링겐을 분할, 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의 영역을 확정했다. 870년 모라비아를 정벌했지만 1년 만에 독립한다. 874년 대머리 카롤루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 875년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루도비쿠스 이탈리아왕은 루도비쿠스 독일왕의 장남 카를로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으나, 이복동생인 카롤루스 칼부스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을 차지하자, 그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던 중 876년 사망했다.
843년부터 876년까지 루도비쿠스 독일왕은 북쪽의 노르만 족의 침입과 체코 지역의 메렌 족들의 침입을 막아냈다.[2] 또한 모라비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프랑크인 선교사들을 파견했지만 모라비아의 복속에는 실패한다. 바이에른공 구엘프의 딸 엠마와 결혼하여 카를로마누스, 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와 딸 이르멘가르트, 기셀라 등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