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국
전 유럽 주권국 939년 ~ 1547년, 당시 프랑스 왕국의 공국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브르타뉴 공국(브르타뉴어: Dugelezh Breizh, 프랑스어: Duché de Bretagne)은 대략 939년[lower-alpha 1]부터 1547년[lower-alpha 2]까지 존재했던 중세 봉건 국가이다. 공국의 주요 영토는 유럽의 북서쪽에 있는 브르타뉴반도이었으며, 서쪽으로는 대서양, 북쪽으로는 영국해협, 남쪽으로는 루아르강, 동쪽으로는 노르망디와 다른 프랑스 주들과 경계를 이루었다. 공국은 939년 무렵 이 지역에서 바이킹들을 몰아내고 세워졌다. 10세기에서 11세기 무렵까지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불안하여 브르타뉴 공작의 영향력 행사는 직접 다스리는 영지 이외에서 제한적 이었다. 이웃한 노르망디 공국과는 복잡한 관계였는데,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했고, 브르타뉴-노르망디 전쟁과 같이 때로는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브르타뉴 공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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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어: Dugelezh Breizh 프랑스어: Duché de Bretagn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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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브르타뉴어: Kentoc'h mervel eget bezañ saotret 라틴어: Potius mori quam fœdari 포티우스 모리 쿠암 포에다리[*][1] 프랑스어: Plutôt la mort que la souillure 프랑스어: À ma vie (변형) | |||
수도 | 낭트, 렌, 반 및 기타 도시 | |||
정치 | ||||
정치체제 | 봉건군주제 | |||
공작 | 클로드 (마지막) | |||
입법부 | 브르타뉴 3부회 브르타뉴 고등법원 | |||
역사 | ||||
성립과 해체 | ||||
• 트랭라포레 전투 | 939년 8월 1일 | |||
• 프랑스 왕국에 합병 | 1547년 8월 13일 | |||
인문 | ||||
공용어 | 브르타뉴어, 갈로어, 라틴어, 프랑스어, 푸아투어 | |||
데모님 | 브르타뉴인 | |||
경제 | ||||
통화 | 여러가지[2] |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는 12세기 중반에 브르타뉴를 침략하여 브르타뉴 공작 코낭 4세와 강화를 맺고 1158년에 낭트 백작이 되었다. 헨리 2세의 아들 제프리는 세속권을 지닌 콩스탕스와의 혼인을 통하여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앙주가는 1204년 프랑스 북부에 있는 그들의 제국이 무너질때까지 브르타뉴의 지배권을 유지했다. 이후 13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프랑스의 왕이 브르타뉴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브르타뉴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수도원 제도는 11, 12세기 브르타뉴 전역에 퍼졌고 13세기에는 최초의 탁발 수도회가 브르타뉴 주요 도시들에서 세워졌다. 14세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 간에 브르타뉴 계승전쟁이 일어나 공국 지배권을 놓고 계승권자끼리 겨루는 내전이 발발했다.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 주권은 1488년 프랑수아 2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공국은 그의 딸 안이 상속했지만,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안의 혼인을 무효시키고 자신과 결혼시켰다. 이에 따라 샤를은 아내의 권리으로써 브르타뉴 공작 작위를 얻었다. 브르타뉴 공작의 직령지는 최후의 독립 공작이자 프랑스의 왕비이던 클로드 드 프랑스가 사망한 후, 브르타뉴 삼부회의 투표에 따라 프랑스 왕령지로 통합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1792년 이래로 프랑스 정부의 다양한 공화정 체제의 결과로서, 브르타뉴 공국은 데파르트망(주) 체계로 대체되어, 프랑스 제5공화국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브르타뉴 지역의 데파르트망들은 행정 구역인 레지옹[lower-alpha 3]에도 속하지만, 브르타뉴 레지옹은 중세 시대의 공국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