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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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프랑스어: Haitian Revolution, 1791년 ~ 1804년)는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나 그 결과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를 세운 혁명을 말한다. 노예제가 시행되었던 시절 동안 신세계에서 수백개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1791년에 일어났던 생도맹그의 반란만이 새 나라로의 영원한 독립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아이티 혁명은 신세계 아프리카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손꼽힌다.
아이티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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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 | |||||||
생도맹그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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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1791-1793 |
1791-1793 | ||||||
1793-1798 |
1793-1798 | ||||||
1798-1801 |
1798-1801 | ||||||
포르투갈 왕국 (1802) | 스위스 | ||||||
지휘관 | |||||||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드살린 앙리 크리스토프 알렉상드르 페시옹 존 메틀랜드 존 덕워스 존 로링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
병력 | |||||||
55,000, 지원병 100,000 |
60,000 프리깃 포함 군함 86 척 | ||||||
피해 규모 | |||||||
군인 불명, 민간인 사망 : <100,000 | 57,000 (전투에서 37,000; 황열병 20,000) |
하지만 독립 정부가 아이티에 세워진 뒤에도, 아이티 사회에서는 프랑스 식민 지배 아래서 나타났던 현상이 그대로 지속됐다. 혁명 이전, 소수의 프랑스인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다수의 가난한 사람을 폭력과 협박을 통해 다스렸다. 당시 지배층 남성과 아프리카계 여성 사이의 혼혈아이들이 태어났고, 이런 혼혈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남자아이들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 군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물라토의 후손들은 혁명 이후에 아이티의 엘리트 계급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날 때 즈음, 많은 혼혈인들은 이미 부를 쌓을만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일부는 이미 토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일부 혼혈인들은 자기 자신을 프랑스의 노예라기 보다는 지배층이라고 생각해 프랑스 출신의 식민지 지도층과만 교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혁명 뒤에도 이런 자들이 정치와 경제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농부였던 다른 대부분의 아이티 사람들과 두 개의 사회적 계급을 만들었다.[1] 또 1820년대에는 프랑스 은행들이 아이티를 새로운 국가로 인정하고 아이티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봉쇄를 풀기 위해 아이티가 노예주들에게 배상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국가의 미래는 배상을 하는데 돈을 빌려주었던 프랑스 은행들에 저당잡힌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액의 노예주에 대한 배상은 아이티의 경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