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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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조제프폴로슈이브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후작(Marie-Joseph-Paul-Roch-Yves-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 1757년 9월 6일 ~ 1834년 5월 20일)는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장교로서 남부 프랑스 오베르뉴 레지옹의 오트루아르 주의 샤바니악 코뮌 출신 귀족이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장군이며, 프랑스 혁명 중에는 국민위병의 지휘를 맡았다.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 |
별명 | 두 세계의 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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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오베르뉴 오트루아르 주 샤바니악 |
사망지 | 파리 |
근무 | 프랑스 미국 |
최종계급 | 소장 (미국) 준장 (프랑스) |
지휘 | 미국 독립 전쟁 |
주요 참전 | 미국 독립 전쟁 |
기타 이력 | 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 휘하에서 대륙군을 지위한 주요 장군이었다.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부상당한 와중에도 성공적으로 부대를 철수시켰다. 로도스 아일랜드 전투에서도 탁월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중반에, 프랑스로 돌아가 프랑스의 지지를 상승시켰다. 돌아온 후, 요크 타운 공략전에서 콘월리스의 부대를 봉쇄하였다.
1788년, 프랑스로 다시 되돌아간 후, 프랑스 귀족 의회에 의해 부름을 받아 프랑스 국고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라파예트는 귀족, 성직자, 평민의 세 신분의 대표자를 모으는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프랑스 인권 선언의 초안과 결론을 작성하였다. 심각한 치안 상황 하에 국민위병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임명되어, 프랑스 혁명 중에 국민위병의 기강을 유지하고, 시위대의 방화에 대응하는 등 국가의 질서를 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자코뱅 당에 의해 박해되는 구실이 되었다. 1792년 8월, 점점 급진적인 파벌들이 힘을 얻게 되자, 라파예트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의해 잡혀 이후 5년 이상 수형 생활을 하게 된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 프랑스에 돌아왔다. 나폴레옹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나, 백일천하 중인 1815년에는 의회(Chamber of Deputies)에 등용되게 된다. 부르봉 왕정복고 중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활동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 지위를 보유하였다. 1824년, 미국의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그에게 "국가적인 내빈"으로서 초청하여 방문을 권유하였고, 여행 중에 그는 미국의 24개 주를 전부 돌아보았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그가 성취한 영광을 기려 미국 내의 많은 도시들과 기념물들이 그의 이름을 가졌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중에, 프랑스의 지도자가 되라는 요청을 거부하였고, 그 대신에 입헌군주제에 도움을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라파예트는 1834년 5월 20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파리 픽푸스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조지 워싱턴의 묘지에서 가져온 흙 아래 묻혔다.
그는 생전에 미국 시민권을 수여받았고, 2002년에는 미국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그가 미국과 프랑스에서 이룩한 성취로서 그는 "두 세계의 영웅 (Le héros des deux mondes)"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