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영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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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영국 총선은 1974년 2월 28일에 영국 하원의 의원 635명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이다. 당초 여론조사에서는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과반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개표 결과 해롤드 윌슨 전 총리가 이끈 노동당이 의석수에서 승리를 거두고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당 역시 원내 과반 의석수에서 17석이 모자라 단독 집권에는 실패했다. 보수당은 이전 선거의 의석수보다 28석이 줄어들었으나 득표율에서는 노동당을 살짝 넘겼다. 결과적으로 단독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는 헝 의회가 되면서 에드워드 히스 수상은 사퇴하고, 해롤드 윌슨 전 총리가 영국 총리에 오르게 됐다. 노동당 역시 단독 내각 구성이 어렵다는 윌슨 총리의 판단에 따라 조기 총선이 예고되었고, 같은해 치러진 10월 선거에서는 노동당이 승리하게 된다.
1974년 2월 영국 총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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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구별 1위 정당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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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에서 북아일랜드 지역은 지역정당이 12석 전 지역구 (연합주의 성향 정당만 11석)를 석권하면서 여타 지역과는 크게 벗어난 결과를 보였다. 이는 얼스터 연합당이 서닝데일 협약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보수당 지지를 철회하기로 한 것에 대해 유권자들이 호응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역시 지역주의 정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득표율이 지난 선거와 비교해서 11%가 증가했고, 의석수도 1석에서 7석으로 늘어나 상당한 약진을 거두었다. 웨일스 지역 정당인 플라이드 컴리 역시 처음으로 참여한 총선에서 당선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전에는 1966년 카마던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에서 승리).
히스 총리의 보수당 내각이 윌슨 대표의 노동당에 비해 득표율이 조금 더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의석수에서 밀렸던 이유는, 각 지역구마다 노동당에게 던져진 표가 좀 더 당선권에 근접했기 때문이며, 여기에 얼스터 연합당 의원들이 보수당 편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한편 지난 선거와 비교했을 때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상대적으로 득표율이 감소했는데, 양당에서 빠져나온 표심이 제레미 소프가 이끌던 영국 자유당에게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자유당은 총 600만 여 표를 얻으며 지난 선거보다 2.5배 불어난 득표율을 거두었으나 당선된 의원 수는 14명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일부 언론에서 내놓은 예측치에 2분의 1에 불과한 성적이었다.[1]
선거 직후 에드워드 히스는 총리 자리에서 즉각 사퇴하지는 않았는데,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 계열 의원들이 내각 신임 문제에 있어 노동당보다는 기존 보수당 정권을 지지하는 데 수긍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히스 총리는 연립내각 구성을 위해 자유당의 소프 대표와 협상에 나섰는데, 보수당 지지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소프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을 대가로 요구하였다. 자유당의 조건에 난색을 표한 히스 총리는 결국 사임하였고 제1당 노동당의 윌슨 전 총리가 영국 총리 자리에 두번째로 오르게 됐다.
한편으로 이번 선거는 1973년 1월 1일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이후 치러진 첫번째 총선이었으며, 1929년 영국 총선 이후 45년 만에 원내 과반 의석수를 차지한 정당이 없는 선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총선이 두번씩 치러지게 된 것은 1910년 이후 처음이었다. 선거방송은 BBC에서 맡았으며 앨러스테어 버넷, 데이비드 버틀러, 로버트 매캔지, 로빈 데이 등이 해설자로 출연하였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