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시작된 항의로 시작된 중국 문화 및 정치 운동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5·4 운동(중국어 간체자: 五四运动, 정체자: 五四運動, 병음: Wǔsì yùndòng 우쓰윈둥[*], 한자음: 오사운동)은 1919년 중화민국에서 발생한 반제국·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이다.[1]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화민국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볼셰비키 혁명을 본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중국 전역에서 확대 전개시키고자 했던 혁명 운동이었다. 5·4 운동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 사건으로 신문화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5·4 운동을 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열강의 관심이 중화민국에서 멀어지자 일본은 산둥을 점령하려고 21개조 요구(1915년)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중국 등은 파리 강화 회의(1919~1920년)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은 산둥의 주권을 회복하고 21개 조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을 폐지할 것을 제의했으나 전승국들이 이를 거부하며,[2]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919년 4월 21일) 그 결과 31개 연합국과 독일 간의 강화조약이 맺어지는데 중국 정부가 이 조약을 인정하려고 들었다.[2] 그러자,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한 청년 학생들은 약 3,000여 명이 톈안먼에 모여 집회를 하고 시위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5월 4일)[2] 이 가운데 덩중샤 등을 비롯한 청년들은 강화조약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차오루린(曺汝霖)의 집을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표출하였다.[2] 시위자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신문화운동도 앞서 이뤄져 왔는데, 이는 중국 유교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주를 이뤘고, 천두슈 등이 실행한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모두 다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전통 문화와 사상이 강도 높게 비판되었다.
베이징의 정부는 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천두슈, 리다자오, 루쉰 등 베이징 대학 교수, 강사와 학생들은 시위 행동에 나서면서 정부에 대항하였는데 톈진·상하이·난징·우한에까지 파급되어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파업을 호소하고 외국 회사 상품의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중국 정부는 시위가 확대하는 것을 진압하고자 하였고,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시위자들이 분노하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 파업, 상가 및 공장 폐쇄, 시위 폭동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노동자 연합 전선 조직이 성립되었다. 사회적 혼란을 불러오자 중화민국 정부도 파리 평화회의의 조인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국가 사태에 울분을 표한 이들로 인한 시위에는 급진적인 볼셰비키와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조직원들의 참여도 포함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을 중국에 이식시키고자 했던 시위자들로 인해 시위의 성격과 추이에 또한 영향이 있었다. 그 후 중국 내 이념 투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는데, 코민테른은 보이틴스키(G. Voitinsky)를 밀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당시 시위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중심 인물이었던 리다자오와 천두슈를 종용하여 중국에 소비에트 조직이 결성되도록 하였다. 이에 5·4 운동의 참여자 중 러시아 혁명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시위자들을 대상으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어 파업과 폭동 등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