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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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년 11월 26일 ~ 1339년 9월 19일)은 일본 제96대 일본 천황이자, 남조(南朝)의 초대 천황(재위: 1318년 3월 29일〈분포 2년 2월 26일〉 - 1339년 9월 18일〈엔겐 4년/랴쿠오 2년 8월 15일)[주석 1], 치천: 1321년 12월 28일〈元亨 원년 12월 9일[1]〉 - 1339년 9월 18일〈엔겐 4년/랴쿠오 2년 8월 15일〉)이다. 휘는 다카하루(尊治, たかはる)다. 호칭의 유래는 9세기에 재위하였던 60대 천황 다이고 천황(醍醐天皇)에서 유래하였다.
고다이고 천황 後醍醐 天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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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대 일본 천황 | |
재위 | 1318년 3월 29일-1331년 10월 21일 |
전임 | 하나조노 천황 |
후임 | 코곤 천황 (비정통) |
재위 | 1333년 7월 7일-1339년 9월 18일 |
전임 | 코곤 천황 (비정통) |
후임 | 고무라카미 천황 (남조; 정통) 코묘 천황 (북조; 비정통) |
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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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휘 | 타카하루 (尊治) |
시호 | 고다이고 (後醍醐) |
능호 | 도노오 능 (塔尾陵) |
연호 | 분포 (文保) 겐오 (元応) 겐코 (元亨) 쇼추 (正中) 가랴쿠 (嘉暦) 겐토쿠 (元徳) 겐코 (元弘) 겐무 (建武) 엔겐 (延元)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88년 11월 26일 |
사망일 | 1339년 9월 19일 |
사망지 | 요시노 행궁 |
왕조 | 남조 |
가문 | 다이카쿠지 왕통 |
부친 | 고우다 천황 |
모친 | 이쓰쓰지 다다코 |
배우자 | 사이온지 키시 주시 내친왕 |
다이카쿠지 왕통(大覚寺統)의 천황이다. 겐코의 난(元弘の乱)으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타도하고 겐무 신정(建武新政)이라는 국왕 친정을 실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의 싸움인 겐무의 난(建武の乱)에서 패배하여 야마토(大和)의 요시노(吉野)로 들어가[2] 남조 정권(요시노 조정)을 수립하고, 타카우지의 무로마치 막부가 옹립한 북조와의 사이에 남북조(南北朝)를 이루며 내란이 발발하였다.
걸출한 통치의 한 명이었다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 남조의 이후 지도자들로부터 평가받았으며[주석 2] 남조와 북조 두 정부의 정책은 겐무 정권의 것을 대부분 기반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필할 만한 것은 '씨족(氏族) 지배'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토지 구분'에 따른 통치라는 개념을 일본에서 최초로 창시해 냈다는 점이다.[3] 재판 기구에 일번일구제(一番一区制)를 도입하고[1] 껍데기만 남아 있던 구니(国)나 군(郡)이라는 지역의 하부 기구를 강화하는 것으로 통치를 원활하게 한다는 수법은[4] 이후의 일본 전국 정권의 통치제도의 기초가 되었다.[1] 그밖에 토지 급부에 강제집행을 도입하여 약소 세력에게도 안전한 토지 배령이 가능한 시스템을 처음으로 일본에서 전국적 ・ 본질적인 것으로 하였다는 것(이를 이어받은 것이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이기도 했던 고 모로나오이다),[5] 관위(官位)를 은상(恩賞)으로써 사용했다는 것,[6] 무사들에게 처음으로 전국적인 정치권력을 주었다는 것, 오슈 쇼군후(陸奥将軍府)나 가마쿠라 쇼군후(鎌倉将軍府) 등 지방분권제의 선구가 되기도 했다는 점[7] 등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은 학문 ・ 종교 ・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업적을 남겼다.[8][9] 유학(儒学)에서는 송학(宋学) 즉 신유학(新儒学)의 수용을 추진한 최초의 군주였다.[10][11] 또한 유직고실(有職故実)의 대표적 연구서인 《겐무 연중행사》(建武年中行事)를 저술하였다. 진언종(真言宗)에서는 아버지인 고우다 상황(後宇多上皇)과 마찬가지로 진언밀교(真言密教)의 비호자로 아사리(阿闍梨, 사승師僧)의 지위를 얻기도 하였다. 선종(禅宗)에서는 선정(禅庭) 즉 불교 사상을 조경이라는 형태로 구현해 낸 일본 전통 정원 양식의 완성자 무소 소세키(夢窓疎石)를 발굴하였다는 점은 이후의 일본의 문화 ・ 미의식(美意識)에 영향을 주었다. 이세 신토(伊勢神道)를 보호하고, 후세의 신토(神道)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서예체의 하나인 신한양(宸翰様)을 대표하는 명필로써 『後醍醐天皇宸翰天長印信(蠟牋)』(몬칸보 고신와의 합작) 등 4건의 천황 자신의 친필 전적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니조파(二条派)의 대표적 가인(歌人)으로 친정 중에 칙찬(勅撰)으로 편찬한 와카 모음집인 《속후습유화가집》(続後拾遺和歌集)이 편찬되었다(찬자는 니조 다메사다二条為定).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의 연구자이기도 하였다. 가가쿠(雅楽)에서는 신령한 비파(琵琶)로 알려져 있던 「겐조」(玄象)의 연주자로, 생황 연주에도 뛰어났다. 다도(茶道)에서는 그 전신인 투다(闘茶)를 가장 이른 시기에 주최한 인물의 한 명이기도 하다.
온화한 인품으로 경모를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적이 되어버린 아시카가 다카우지조차도 생애에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서 경애를 표하였다. 진언율종(真言律宗)의 승려로 한센병 환자 등의 구제에 생애를 바쳤던 승려 인성(忍性)을 재발견하고 「인성보살」(忍性菩薩)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칭송하였다. 또한 몬칸보 고신(文観房弘真) 등의 승려들을 통해 각지의 율종(律宗)의 민중구제활동도 지원하였다. 정실인 중궁(中宮) 사이온지 기시(西園寺禧子)는 재색을 겸비한 칙찬 가인(勅撰歌人)으로 금슬이 좋은 부부였으며 《마스카가미》(増鏡) 종반부의 제재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하고 30년 정도 지나서 북조에서 완성된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인 《태평기》(太平記)에서는 호전적이고 집념이 강하며 독재적인 암군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고다이고 천황의 인물상은 1960년대 사학자 사토 신이치(佐藤進一)의 학설이나 1980년대의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의 「이형(異形)의 왕권」(異形の王権)이라는 논을 통해,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도 정착하였다. 한편으로 사토의 연구를 계기로 하여 일본에서 모리 시게아키(森茂暁) 등에 의한 실증적인 연구가 축적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세기 말에 이치자와 테쓰(市沢哲)는 겐무 정권(建武政権)의 정책에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후기의 조정 정치와 연속되는 부분이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이토 기요시(伊藤喜良)는 겐무 정권은 단명에 그쳤다고 해도 그 내부에서의 개혁은 현실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2000년대에는 우치다 게이이치(内田啓一)가 불교 미술 ・ 불교학적 견지에서 아미노의 「이형의 왕권」론에 대해 반박을 내놓았다. 이치자와 ・ 이토 ・ 우치다 등의 설을 기반으로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걸쳐 일본 학계에서의 연구가 진전된 결과,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후기의 조정 및 막부(幕府) ・ 겐무 정권(建武政権) ・ 무로마치 막부의 정책들에는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2020년 시점에서의 새로운 연구 범위에서는 겐무 정권의 붕괴는 우발적인 사건들이 겹치고 겹친 것으로 꼭 필연이었다고 할 수는 없고, 고다이고 천황은 높은 내정적 수완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인격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기에 이르렀다.[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