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대한민국의 정치인 (1898–199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내무부 장관, 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윤치영 尹致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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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서울시장 취임 당시 | |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 | |
임기 | 1948년 7월 17일 ~ 1948년 12월 24일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이시영 |
총리 | 이범석 |
차관 | 황희찬 |
이름 | |
별명 | 아명: 자능(子能) 호: 동산(東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8년 2월 10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안국동 |
사망일 | 1996년 2월 9일(1996-02-09)(97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
경력 |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대한국민당 전임위원 자유당 최고위원 민주공화당 고문 경희대학교 재단 이사장 |
정당 | 무소속 |
형제자매 | 윤치오(이복 형), 윤치소(이복 형) |
배우자 | 풍산 홍씨 홍진순(사별 초배 부인, 자녀 없었음) 전주 이씨 이감덕(사별 계배 부인, 자녀 없었음) 우봉 이씨 이병영(사별 3취 부인, 자녀 2남 2녀) 밀양 이씨 이은혜(사별 4취 부인, 자녀 1남) |
자녀 | 3남 2녀(셋째 아들 윤인선) |
종교 | 개신교[1] |
서명 |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하와이에서 그를 도와 활동하다 이후 임정 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고,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며 9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2]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다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과 1960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제2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 1963년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3] 1980년 정계에서 은퇴, 사회 원로로 활동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내내 윤보선과 정치적 거취를 달리했다.[2] 한민당으로 정계입문하였으나 입각 후 한민당을 탈당,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한민당과 민국당에 대항하여 친여 성향의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야당을 견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