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1509년부터 1547년까지 잉글랜드의 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헨리 8세(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잉글랜드 국왕이다. 튜더가로서는 두 번째 국왕이었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에 이르는 결혼과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불화 끝에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분리 독립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수장령은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를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지정함으로써 교황청의 관할권을 부정한 것으로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신학과 조직을 갖는 성공회로 발전하였다.
헨리 8세 Henry VI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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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초상화 | |
잉글랜드 국왕 | |
재위 | 1509년 4월 21일~1547년 1월 28일 |
대관식 | 1509년 6월 24일 |
전임 | 헨리 7세 |
후임 | 에드워드 6세 |
아일랜드 국왕 | |
재위 | 1542년-1547년 1월 28일 |
전임 | (신설) |
후임 | 에드워드 6세 |
아일랜드 영주 | |
재위 | 1509년-1542년 |
전임 | 헨리 7세 |
후임 | (폐지) |
웨일스 공 | |
재위 | 1502년 4월 2일-1509년 4월 21일 |
대관식 | 1504년 2월 18일 |
전임 | 아서 튜더 |
후임 | 에드워드 튜더 |
군주 | 헨리 7세 |
콘월 공작 | |
재위 | 1502년–1509년 |
전임 | 아서 튜더 |
후임 | 헨리 튜더 |
요크 공작 | |
재위 | 1494년–1509년 |
전임 | 슈루즈베리의 리처드 플랜태저넷 |
후임 | 찰스 스튜어트 |
잉글랜드의 원수백 | |
재위 | 1494년–1509년 |
전임 | 버클리 후작 |
후임 | 노퍽 공작 |
잉글랜드의 오항총독경 | |
재위 | 1493년–1509년 |
전임 | 윌리엄 스콧 |
후임 | 에드워드 포이닝스 |
신상정보 | |
가문 | 튜더 |
부친 | 잉글랜드의 헨리 7세 |
모친 | 요크의 엘리자베스 |
배우자 | 아라곤의 캐서린 앤 불린 제인 시모어 클리브즈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아 |
자녀 |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콘월 공작 헨리 |
종교 | 천주교 → 잉글랜드 성공회 |
서명 |
잉글랜드 국교회의 성립은 헨리 8세의 개인적 이유에서 촉발되었으나 당시 이미 유럽을 휩쓸고 있던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던 많은 르네상스 인문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의 지지 속에 이루어졌다.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이를 왕실과 민간의 재산으로 불하하여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종교적 사건일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헨리 8세는 교황 수위권에 대항하기 위해 왕권신수설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제군주로서 행동하였다. 그는 종종 반대자에게 정치적 반역 혐의와 함께 이단 혐의를 씌웠고, 사권박탈법으로 피의자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여 정식 재판 없이 처형하였다.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의 두드러진 인물들을 총리로 두어 통치하였으나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추방하거나 처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로마의 교황청으로 가던 교회의 수입 상당수가 왕실로 향하게 됨으로써 헨리 8세는 유래없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비효율적 국정 운영, 막대한 비용을 들인 전쟁 등으로 재정 사정은 좋지 못하였고 종종 파산의 위기를 겪었다.
1535년과 1542년의 웨일스 법을 통해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하위 구역으로 완전히 통합하였고 1542년 아일랜드 군주법을 통해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은 자동적으로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임하였다.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의 차남으로 원래는 형인 아서 튜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으나, 아서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헨리 8세의 첫 아내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는 형 아서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서가 사망한 뒤 스페인과의 지속적인 동맹을 원하였던 헨리 7세의 뜻에 따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1509년 왕위 계승과 함께 이루어진 결혼 당시 헨리 8세는 17세, 카탈리나는 24세로 나이 차이가 꽤 있었으나 금슬은 나쁘지 않았다. 카탈리나는 몇 차례의 유산 끝에 1511년 콘월 공작 헨리를 출산하였으나 첫 아들은 생후 1개월을 넘지기 못하고 사망하였고 이후 장녀 메리 1세를 낳은 뒤 몇 차례의 임신도 유산하다 폐경을 맞았다.
잉글랜드는 12세기 수 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던 마틸다의 사례를 제외하면 여성이 군주가 된 전례가 없었고, 여왕이 즉위하여 결혼하면 튜더가의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헨리 8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또한 헨리 8세는 프랑스의 왕위계승권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을 근거로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있던 프랑스 왕좌에 대한 야망을 위해서라도 후계자는 아들이 되어야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탈리나가 폐경으로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게 된 일은 헨리 8세에게는 매우 중대한 위기로 다가왔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파혼하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성과 재혼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럽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결혼을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여야만 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갖가지 예외를 들어 결혼을 무효화함으로써 이혼의 길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 역시 교황청의 승낙을 얻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자 하였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가 이미 형인 아서 튜더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과 한 결혼은 무효라는 주장을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독립하는 강경한 대립을 통해 원하는 바를 강행하였다. 이에 교황청 역시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헨리 8세는 앤 불린, 제인 시모어, 클레페 공녀 아나,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 등의 아내를 맞았다.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나 헨리 8세와 불화 끝에 반역과 간통 혐의로 처형되었고,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산욕열로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클레페 공녀 아나는 토머스 울지가 협상 끝에 잉글랜드로 오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유로 파혼하였으며, 캐서린 하워드는 불화 끝에 처형되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이르러 맞이한 캐서린 파와는 비교적 원만한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 사망 이후 제인 시모어의 혈육인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헨리 8세를 매력적이나 야욕이 강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통치자로 여겼다.[1][2] 그는 스스로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다재 다능한 면모를 과시하였고 각종 스포츠와 게임, 도박 등의 활동에도 열정을 보였다. 젊어서는 탄탄한 몸매를 지녔으나 점차 체중이 늘어 중년이 되자 심각한 과체중과 함께 여러 질병을 앓았다. 말년의 헨리 8세는 종종 음탕하고 이기적이며 편집증적인 폭군으로 묘사된다.[3] 헨리 8세의 사망 이후 당시 아홉살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후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