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정치인 (1922-201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철승(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2016년 2월 27일)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정치인, 시민사회기관단체인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이철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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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년 5월 15일(1922-05-15) 일제강점기 경성부 |
사망 | 2016년 2월 27일(2016-02-27)(93세) 대한민국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전의 |
학력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
직업 | 학생운동가 정치가 보수주의 운동가 저술가 |
경력 | 대한민국 헌정회 명예회장 |
부모 | 이석규(부), 청주 한씨 부인(모) |
배우자 | 김창희 |
자녀 | 이동우(아들), 이양희(딸)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의원 선수 | 7 |
의원 대수 | 3·4·5·8·9·10·12 |
정당 | 무소속 |
경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완주와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징집반대 등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고, 백부 이석주의 권고로 인하여 인촌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뒤 보성전문학교 내 반일 학생이며 강제 징집 거부 등으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다. 그 뒤 오사카의 병참부대에 배속되어 1945년 8월 자살특공대로 차출당했다가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광복 직후에는 학병 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그의 성향을 봤을 때 좌파 단체인 학병동맹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후 군정기 때는 우익 학생 운동과, 신탁통치 반대 시위 당시 김구, 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 친일 경찰 채용 등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였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들 병사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 환의 자금과 재물을 착복한 것을 국회에서 폭로하게 하였다. 제1공화국 기간 중 자유당에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초대 제헌의원 선거에는 낙선하였으나, 3대, 4대, 5대, 8대, 9대, 10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7선 의원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하고 반 군정 운동을 하였다. 1970년대 김영삼, 김대중, 윤보선, 유진산 등과 신민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중도화합론을 주장했다 하여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신민당을 박정희의 어용야당으로 만들려는 차지철에게 매수당했으며 그래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과 당 총재 직을 놓고 경합을 벌였으나 패배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조직폭력배인 김태촌을 시켜 김영삼을 습격하게 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3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면서 습격은 실패했으며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을 가진 김영삼이 맞불 작전으로 김영삼 본인 역시 조직폭력배를 사다가 이철승을 공격하도록 해서 이철승의 조직폭력배와 김영삼의 조직폭력배가 패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를 신민당 각목 사건이라 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 은퇴,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