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몽골제국의 제 5대 카안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쿠빌라이 카안(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ᠬᠠᠭᠠᠨ Qubilai Qa'an, 페르시아어: قوبيلاى خاقان Qūbīlāī xāqān, Хубилай хаан, 忽必烈 可汗), 1215년 9월 23일(음력 8월 28일) ~ 1294년 2월 18일(음력 1월 22일)) 또는 쿠빌라이 대칸(Хубилай их ван)은 대원의 제5대 카안(재위 : 1260년 ~ 1294년)이자, 칭기스 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Qubilai, 한국 한자: 忽必烈 홀필렬),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ᠰᠡᠴᠡᠨ
ᠬᠠᠭᠠᠨ Sečen Qa'an, 薛禪 可汗, 키릴문자: Сэцэн хаан)이다. 몽골에서는 소토 세첸 카안(Суут Сэцэн хаан, 훌륭하고 현명한, 총명한 카안)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태국, 캄보디아, 자와섬을 원정하였으며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칭기즈 칸의 아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다.
쿠빌라이 세첸 카안 忽必烈 薛禪可汗 ᠬᠤᠪᠢᠯᠠᠢ ᠰᠡᠴᠡᠨ ᠬᠠᠭᠠᠨ sečen qaγan Суут Сэцэн хаа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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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영정 | |
제5대 몽골 대칸 | |
재위 | 1260년 5월 5일 ~ 1271년 12월 18일 |
대관식 | 중통(中統) 원년 3월 24일 (1260년 5월 5일) |
전임 | 뭉케 카안 아리크부카 |
후임 | (대원 제국 설립) |
제1대 대원 황제 | |
재위 | 1271년 12월 18일 ~ 1294년 2월 18일 |
대관식 | 지원(至元) 8년 11월 15일 (1271년 12월 18일) |
전임 | 쿠빌라이 칸 (몽골 카안) |
후임 | 테무르 울제이투 카안 |
수상 | 친킴 |
재상 | 아흐메드 |
이름 | |
휘 | 쿠빌라이(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러시아어: Хубилай хаан, 한국 한자: 忽必烈 홀필렬) |
별호 | 세첸 카안(몽골어: ᠰᠡᠴᠡᠨ ᠬᠠᠭᠠᠨ Sečen Qa'an, 한국 한자: 薛禪可汗 설선 가한), 소토 세첸 카안(Суут Сэцэн хаан)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
존호 |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
연호 |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94년 |
칸호 | 세첸 카안(몽골어: ᠰᠡᠴᠡᠨ ᠬᠠᠭᠠᠨ Sečen Qa'an, 한국 한자: 薛禪可汗 설선 가한)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 혹은 1213년 음력 8월 28일)(9월 15일) |
출생지 | 막북(漠北) 초원 혹은 허베이성 |
사망일 | 지원(至元) 31년 1월 22일 (1294년 2월 18일) (79세 혹은 81세) |
사망지 | 원나라 대도(현, 베이징 시) 황궁 자단전 |
왕조 | 대원 |
가문 | 보르지긴 |
부친 | 툴루이 |
모친 | 소르칵타니 베키 |
배우자 | 소예순성황후 남필 황후 |
자녀 | 친킴 제국대장공주 |
종교 | 티베트 불교, 유교 성리학, 샤머니즘, 텡그리 |
묘소 | 부르칸 칼둔 |
서명 |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유학에서 따서 대재건원(大哉乾元)의 약칭인 대원(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1276년 2월 4일 남송의 수도 임안을 점령한 뒤 1279년 3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베트남·일본 등지에 군사를 보내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채용하고, 실크로드를 정비, 수호하였다.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 제국과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쿠빌라이 칸은 유럽의 전설이 되었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에게 서녀를 주어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고, 아리크 부케와 카이두를 비롯, 반란에 직면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