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당시 진리처럼 믿어온 지구중심설(천동설)의 오류를지적하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틴어: Nicolaus Copernicus / 폴란드어: Mikołaj Kopernik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 독일어: Nikolaus Kopernik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당시 진리처럼 믿어온 지구중심설(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다. 여러 가지 이름 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1][2][3][4]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 |
출생 |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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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43년 5월 24일(1543-05-24)(70세) 폴란드 프롬보르크 |
국적 | 폴란드 |
종교 | 가톨릭 |
주요 업적 | 태양중심설 창시 |
분야 | 천문학, 수학, 약학, 경제학, 교회법 |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와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자라며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위주로 하던 실지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이탈리아 유학시기에 접한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의 영향으로 태양중심설을 구상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대한 개략적인 생각을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그 후 1510년에 태양 중심의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요약본 형태의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렸다.
<짧은 해설서> 발표 후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한다.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성을 하나, 하나 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체계로 보아 행성간의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다.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금서목록에 추가되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