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494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왕조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부여(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아무르강(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마지막 왕은 잔왕이며, 494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부여 扶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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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북부여 | 동부여 | ||||
수도 | 부여성 | 가섭원 | ||||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
?? 국왕 동명왕 잔왕 | ?? 국왕 해부루왕 현왕 | ||||
성립 |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세기 | ||||
멸망 | 494년 (고구려에 합병) | 410년 (고구려에 합병) | ||||
부여의 유물이 발견되는 창춘 지역. | ||||||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그리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2]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3]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4]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5] 특히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6]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부여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7]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숙신)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다.[8] 또한,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나라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되었다. 서쪽에는 선비족 남쪽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으며 특히 고구려는 부여를 보호국으로 삼고 부여를 지나서 북중국을 수시로 공격하였고 많은 북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285년, 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족 모용외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문자왕) 고구려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