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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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朋黨, 중세 한국어: 쁘ᇰ다ᇰ〯)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지역적,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붕당 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독특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현대의 정당(政黨)처럼 정치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구분된 집단이 아니라 지연, 학연,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가 니뉘고 구성되었으므로 붕당(朋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1][2]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고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붕당 정치는[3] 현대의 정당 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또한 정치적 역학 관계의 정립에 있어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한 타율적 정리라고 한다면, 붕당론은 자율적 힘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4]
조선초기부터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는 15세기 후반 성종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하였다.[5] 훈구파는 4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으나 사림파는 이를 극복하고 16세기 중엽 선조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6] 그러나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東西分黨) 사건을 계기로[7]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8][9] 붕당시작의 근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운영의 방법을 놓고 선후배 세대간의 입장 차이와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에 있었다.[5]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 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 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10]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었는데,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뉜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하며 소북은 몰락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대북이 숙청당한후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몰락한후 득세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을사처분(1725)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았으나 임오화변(1762)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되었다. 순조때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 남인과 시파가 숙청을 당하며 재기불능상태가 되고 벽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