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조선의 무관 (1545–159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순신(한국 한자: 李舜臣,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였으며 한성 출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 훈련원 봉사(종8품), 함경남병사 군관, 훈련원 참군(정7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함경도 조산보 병마만호(종4품), 전라감사 조방장, 선전관,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태인현감 겸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거쳐 정헌대부(정2품상계)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이르렀다.[2]
이순신 李舜臣 | |
충무공 | |
전(傳) 충무공 이순신 상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 |
조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양력)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양력) | |
제1·3대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26일 ~ 1597년 3월 14일 (양력)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양력) | |
본명 | 이순신(李舜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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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여해(汝諧) |
호 | 기계(器溪), 덕암(德巖) |
시호 | 충무(忠武) |
출생일 | 1545년 4월 28일(1545-04-28) |
출생지 | 조선국 한성부 건천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 |
사망일 | 1598년 11월 19일(1598-11-19) |
사망지 | 조선국 경상우도 노량해협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작위 | 충무공(忠武公) |
관직 | 정2품 정헌대부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
본관 | 덕수 |
부모 | 아버지: 이정(李貞) 어머니: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草溪卞氏) |
배우자 | 방진(方震)의 딸 방수진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부안댁 |
자녀 | 정실 부인 상주 방씨 소생 장남: 이회(李薈) 차남: 이열 삼남: 이면(李葂) 장녀: 덕수이씨 첩: 해주 오씨(海州 吳氏) 소생 |
충성 대상 | 조선 |
주군 | 조선 선조 |
복무 | 조선군 |
복무기간 | 1576년 ~ 1598년 |
근무 | 조선 수군 |
최종계급 |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
지휘 | 삼도수군 |
주요 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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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력 | 명 정1품 수군도독 |
서훈 |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덕풍부원군 증(贈) 좌의정, 가증(加贈) 영의정[1] |
사당 | 현충사 |
이순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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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표기: | 이순신 |
한자 표기: | 李舜臣 |
개정 로마자 표기: | I Sunsi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I Sunsin |
예일 표기: | I Swunsin |
국제 음성 기호: | [i.sʰun.ɕin] |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1581년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가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선조 20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가 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3]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