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종실 출신 문신, 시인, 학자, 정치인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원익(李元翼, 1547년 12월 5일(음력 10월 24일) ~ 1634년 2월 26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태종의 서자였던 익녕군(益寧君) 치(袳)의 4세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외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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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정보 이원익, 별호 ...
이원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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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 초상화 (1590년작)[2] |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 |
이름 | |
별호 | 자: 공려(功勵) 호: 오리(梧里) 시호: 문충(文忠)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47년 12월 5일(1547-12-05)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금천현 서면 |
사망일 | 1634년 2월 26일(1634-02-26)(86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학력 | 1569년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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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二等)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그는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 정권에 의해 영의정에 임명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공신들의 여론에 반대하여 만류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여 남인에 학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 키작은 정승이라는 별명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