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 (1917–1994)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정일권(한국 한자: 丁一權, 1917년 11월 21일~1994년 1월 17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의 외교관 겸 고위정치인이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튀르키예(터키)의 주재 대사·대한민국의 미합중국(미국)의 주재 대사 등을 거쳐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겸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의 외교관 겸 고위정치인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지금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역의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1940년 당시 5년 동안 일제 시대 만주국의 만주군 육군 장교와, 1945년 을유 해방(8·15 광복)을 비롯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에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장성급 장교 등으로 복무를 하다가, 1957년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대한민국의 제3·5대 주미 대사, 제11·13대 외무부 장관, 제9대 국무총리, 국정자문회의 원로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1921년 개명(改名)하기 이전까지의 아명(兒名,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정일진(한국 한자: 丁一鎭)이며, 호(號)는 청사(淸史)이고, 창씨명(일본식 이름)은 나카지마 잇겐(中島一權)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 당시의 소비에트(소련)의 연해주 영토에서는 이켄 테이(이껜 쩨이, 러시아어: ИккЭн ТЭи 이켄 테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정일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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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당시의 현역 육군 대장 및 육참총장 역임 시절의 정일권 장군의 모습 | |
대한민국의 초대 튀르키예 주재 대사 | |
임기 | 1957년 5월 13일~1959년 4월 25일 |
대통령 | 이승만 |
주석 | 젤랄 바야르(튀르키예 대통령) |
부통령 | 장면 |
수상 | 아드난 멘데레스(튀르키예 총리) |
장관 | 조정환(외무부) |
차관 | 김동조(외무부) |
대한민국의 제9대 국무총리 | |
임기 | 1964년 5월 10일~1970년 12월 19일 |
전임 | 최두선 |
후임 | 백두진 |
대통령 | 박정희 |
이름 | |
별명 | 아명(兒名)은 정일진(丁一鎭) 호(號)는 청사(淸史) 일본식 이름은 나카지마 잇겐(中島一權) 소련식 이름은 이켄 테이(ИккЭн ТЭ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17년 11월 21일(1917-11-21) |
출생지 |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1]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94년 1월 17일(1994-01-17)(76세) |
사망지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
국적 | 대한민국 |
경력 | 국회의장 민주공화당 최고위원 |
정당 | 무소속 |
본관 | 영광(靈光) |
부모 | 정기영(부), 김순복(모) |
형제자매 | 형 2명(모두 어린 시절에 병으로 요절) |
배우자 | 윤계원(사별), 박혜수(재혼) |
자녀 | 3남 4녀 (장녀 정영혜 차녀 정성혜, 삼녀 정지혜 장남 정기훈, 사녀 정희진) |
친인척 | 정좌진(친조부) 정도기(재종조부) 박종식(계취 장인) 이훈(첫째사위) 이동휘(둘째사위) 최상규(셋째사위) 이형근(사돈) 이상근(사돈) 최경록(사돈) 이창선(사돈) 이응준(사돈) |
종교 | 개신교 |
웹사이트 | 정일권 - 대한민국헌정회 정일권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군사 경력 | |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정일권 | |
복무 | 만주국군 육군 |
복무기간 | 1940년 ~ 1945년(만주군 육군) 1946년 ~ 1957년(대한민국 육군) |
최종계급 | 만주국군: 상위 대한민국 육군: 대장 |
지휘 | 육군본부 합동참모본부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만주에서 주 활동) 한국 전쟁 |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육군에서 중위로 전역한 정기영 선생이고, 이처럼 그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니콜리스크로 이주한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원군 출신의 이주민의 자녀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함경북도 경원을 거쳐 함북 청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6세 때 함북 경원으로 다시 되돌아와 1924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나 불우한 유년기라는 소학교 시절을 보냈고, 1930년 만주 영신중학교에 입학했다가 통합되어 광명중학교로써 졸업하였다. 광명중학교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 학교 선배이자 영어 교사인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봉천군관학교로 진학한다. 결국 그는 1937년 9월에 봉천군관학교 제5기로 졸업하고, 성적우수자라는 명목으로써,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편입학했으며,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45년 8월 15일 (1945-08-15), 광복(을유 해방) 후 귀국, 대한민국 육군에 참여하였고, 1949년 육군 준장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 군 복무시 제5·8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내었고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군 주요 지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특히 인천상륙작전 등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1950년 제5대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국군 총사령관을 겸임하여 육해공군을 지휘하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민간인 학살사건 등으로 인하여 국군 총사령관 사퇴를 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1954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나 휴전 후의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는 만주군 인맥의 일원으로서 군내 파벌 갈등에 가담하였다. 1957년 예편 후 이승만에 의해 주터키대사로 임명된 뒤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주프랑스대사, 미국 주재 대사로 임명된 뒤, 미국에서 4·19 등을 접하였으며, 윤보선 과도 정부 장면 내각(제2공화국)에서 주미대사,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거쳐 5·16 발생 후 박정희를 지지하였다.
1964년 총리가 된 뒤 한일 협정 등의 체결을 성사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66년부터 이듬해 1967년에는 다시 외무부 장관이 되어 총리로 외무장관을 겸직하며 한일협정 직후의 문제를 수습하였다. 총리 재직 중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살해 사건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자 총리직을 사퇴했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상임 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부터 제8·9,·10대 국회의원(3선)에 당선되었으며, 1973년부터 국회의장 등을 지냈고, 198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뒤 국정자문위원 등을 거쳐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취임하였다. 한일 회담 강행과 정인숙 사건 등으로 비판 여론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신임으로 정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