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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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장덕수 張德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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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12월 10일(1894-12-10) 조선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
사망 | 1947년 12월 2일(1947-12-02)(52세)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화기에 의한 죽음)됨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제국 |
본관 | 결성 |
학력 |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오리건 주립 대학교 언론학과 런던 대학교 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오리건 주립 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직업 | 정치가 언론인 교수 |
경력 | 보성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 부사장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
부모 | 장붕도(부), 김현묘(모) |
형제 | 장덕준(형), 장덕진(아우) |
배우자 | 박은혜(재혼) |
자녀 | 장숙원(딸) 장혜원(딸) 장지원(아들) 장사원(아들) |
종교 | 개신교 |
정당 | 한국민주당 |
당내 직책 | 정치부장 |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다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고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회주의운동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 이후 유학길에 올라 영국과 미국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36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사태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일제 어용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글들을 수없이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민족을 배반했다.[1]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 외무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후 반대'라는 입장을 내서 이승만, 김구와 갈등을 빚었지만,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은 초지일관으로 지지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박광옥, 배희범의 총에 맞고 절명하였다. 이들은 장덕수가 젊어선 공산당, 나중엔 친일파, 게다가 찬탁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했다. 미군정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2]
1948년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3]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