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마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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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어: Євромайдан 예우로마이단[*])은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 연합과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요구로 시작된 대규모, 지속적인 시위이자 시민 혁명이다. 시위는 계속 커져 현재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제2정부의 해임을 요구하고 있다.[67] 시위대들은 2013년 11월 30일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참여한다고 언급했다.[3] 2014년 1월 25일부터 시위대들은 광범위한 인권 억압, 권력 남용, 정부 부패 인식 등에도 항의하기 시작했다.[68]
유로마이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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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2015년 우크라이나 위기의 일부 | |||
날짜 | 2013년 11월 21일[1] ~ 2014년 2월 23일 (활동 기간) 2014년 2월 24일 ~ 8월 9일 (혁명 이후 기간) | ||
지역 | 우크라이나, 주로 키이우 | ||
원인 | |||
목적 | |||
종류 | 시위, 인터넷 활동, 시민 불복종, 시민 저항, 핵티비즘,[8] 정부청사 점령[nb 1] | ||
결과 | 현재 진행 중 | ||
시위 당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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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
참여 인원 | |||
사상자 | |||
이 시위는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EU와의 통합을 위한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위원회 조약과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자유 무역 협정(DCFTA)의 서명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와 경제 의존을 천명했고,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여 시작했다.[69] 며칠 후 대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규모가 불어났다.[70] 우크라이나-EU 통합 갱신 요구가 계속 이루어지지 않지만 유로마이단은 EU 자체에 대한 중요한 정치적 상징 사건, 특히 "역사상 사상 최대의 친유럽 집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71]
이 시위는 대규모의 우크라이나 경찰 파견, 계속된 영하의 온도, 강설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72][73] 11월 30일 아침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증가하는 폭력 때문에, 시위대는 12월 1일, 12월 8일[74] 키이우에 40만~80만명이 모이면서 계속 증가하고 있다.[36] 이후 몇 주 동안 항의 시위는 5만명에서 20만명으로 변동을 보이고 있다.[75][76] 경찰 및 정부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12월 1일과 2014년 1월 19일~25일 동안 폭력 집회가 일어났다.[77] 2014년 1월 23일부터는 유로마이단의 서우크라이나 주 정부청사 및 지역의회에 대한 점령 운동이 시작되었다.[12] 자포리자, 수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등 러시아어권에서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점령하려 시도하고 있으나, 경찰 및 군병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12]
2013년 12월 설문조사(서로 다른 3개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들의 45%~50%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하고 있으며, 42%~50%가 반대하고 있다고 나타났다.[78][79][80] 가장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는 지역은 키이우(75% 지지)와 서우크라이나(80% 지지)로 나타났다.[78][81] 12월 7~8일간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는 73%의 시위대가 요구 사항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시위할 것이라고 응답했다.[3] 또한, 설문 조사에서는 의견이 3개 방향으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청년층의 절대다수가 친유로파인데 반해, 고령층(50대 이상)은 벨라루스-카자흐스탄-러시아 관세 동맹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82]
결국 2014년 2월 18일 키이우에서 2만명의 시민이 우크라이나 헌법을 2004년의 헌법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날 75명이 죽고 1100명이 부상했다. 이후 이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폭력 진압을 규탄했다. 다음날 정부와 야권, 시위대는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2014년 1월부터 지속적으로 폭력 시위를 주도해온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섹터와 스보보다(우크라이나 자유당) 계열의 시위대는 합의안을 거부하였으며,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키이우 시내를 장악하였다. 시위대가 키이우 시내를 장악한 뒤 이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야권이 주도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에 대한 지지는 국가별로 엇갈렸다. 최고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소속된 우크라이나 지역당 일부, 일부 무소속의원 그리고 동부 주민 조차 야누코비치의 잠적을 비판했다. 야누코비치가 잠적함에 따라 동부에서도 서부가 차지한 정부를 따르기는 했으나, 러시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크림반도에서는 차라리 러시아로 돌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크림반도에서는 시민들이 행정 관청에 걸린 국기를 러시아의 국기로 바꿔다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편 2월 27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피신하여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2월 28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러시아 정부는 크림반도에 2000여명의 군을 파병하였다.(크림 위기)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침공으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