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즈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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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즈 포위 또는 팔레즈 포위전(영어: Falaise pocket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오버로드 작전에서 결정적인 교전이었다. 군사적 고립지대가 팔레즈 주변으로 형성되었고, 제7군과 제5기갑군으로 구성된 독일 B 집단군 (공식적으로는 Panzergruppe West)이 서구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팔레즈 포위망은 팔레즈 틈(영어: Falaise gap이라고도 불렸다. 독일군이 그들의 포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장벽이 생긴 이후에는 이 전투를 샹부아 틈, 팔레즈-샹부아 틈, 트런-샹부아 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전투로 센강 서쪽에 있는 대부분의 B 집단군이 궤멸되었으며, 이것은 연합군에게 파리와 독일 국경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팔레즈 포위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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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로드 작전의 일부 | |||||||
팔레즈 포위전의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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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자유 프랑스 | 나치 독일 | ||||||
지휘관 | |||||||
버나드 몽고메리 | 하인리히 에버바흐 | ||||||
군대 | |||||||
제2기갑사단 | 제7군 | ||||||
병력 | |||||||
최대 17개 사단 | 14개-15개 사단 | ||||||
피해 규모 | |||||||
미국
영국
자유 프랑스
캐나다
폴란드 서부군 |
6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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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라 작전의 결과로 미군은 노르망디 해변에서 벗어났고, 조지 패튼 장군 휘하의 미국 제3군은 노르망디 남쪽과 남동쪽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의 돌파로 인한 패배와 영국-캐나다의 즉각적인 코몽과 캉 남부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적을 물리칠 무기와 장비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B 집단군의 사령관인 육군 원수 귄터 폰 클루게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철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모르탱에서 반격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감손된 4개의 기갑사단들은 미국 제1군을 물리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뤼티히 작전은 결과적으로 재앙이었고, 독일군은 더 심각한 연합군의 포위를 맏닥뜨려야 했다 .
8월 8일, 연합군 육군 병력의 총사령관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B 집단군을 포위하기 위해 연합군을 팔레즈-샹부아 지역으로 모이게 하도록 지시했고, 미국 제1군에게 포위의 남쪽 부분을, 영국 제2군에게 공격 핵심을, 그리고 제1캐나다군에게 포위의 북쪽 부분을 맡게 했다. 독일군은 8월 17일과 8월 19일 후퇴를 시작했고, 연합군은 샹부아에서 만났다. 독일군의 반격으로 연합군의 전선에 틈이 생겼고, 고립 지대의 입구를 감제하던 위치인 262고지에서 독일군이 폴란드 제1기갑사단의 포위를 돌파할 수 있게 했다. 8월 21일 저녁, 포위망은 완전히 닫혔고, 5만 명의 독일군이 이 지대에 갇히게 되었다. 많은 독일군은 탈출하였으나, 병력과 물자 손실이 컸다. 이틀 후인 8월 23일 연합군의 파리 해방이 끝났고, 8월 30일 B 집단군의 잔존 세력은 센강을 건너 철수했다.